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정계 진출 ==== 그렇게 한층 자신을 갈고닦은 키케로는 로마로 귀국해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으로 선출돼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고 시칠리아 서부 릴리바이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솜씨 있는 일 처리로 지역 주민들의 호감을 사고, 시라쿠사에선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해 지역 주민들을 환호케 했다. 이런 업적으로 키케로는 시칠리아에서 적지 않은 지지자를 확보했으며, 본인도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했던 나머지 공적에 대한 자부심이 자만심에 달해 스스로를 로마 전체의 명사로 여길 지경이었으나 얼마 후 그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재무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캄파니아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만났으나 그중 한 사람은 그가 로마에서 이곳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로마의 현황을 물었고, 상황을 수습하려 한 사람들도 그의 부임지로 엉뚱한 지명을 언급해 키케로가 직접 오류를 정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로마에서 키케로는 이제 막 원로원에 입성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굴욕 아닌 굴욕을 겪은 키케로는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바다에 고작 돌멩이 하나를 던졌을 뿐임을 깨닫고 전보다는 겸손해짐과 동시에 새삼 성공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시칠리아엔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래서 이들이 꾸린 대표단은 기원전 70년 시칠리아에서 사령관을 역임한 폼페이우스의 추천을 받아 키케로에게 전 시칠리아 총독이자 탐관오리인 가이우스 베레스를 고발해 줄 것을 의뢰하고,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키케로는 고민 끝에 피호 관계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이를 승낙한다. 이어서 시칠리아로 건너가 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증거를 확보해 정식으로 베레스를 고발, 변호인의 허를 찌르는 수로 패소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승소를 이끌어 낸다. 당시 로마 법정에선 고소인과 변호인이 길고 긴 서두를 끝낸 뒤에야 본론에 들어갔는데 키케로는 배심원과 변호인의 동의하에 그런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베레스의 유죄를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해 첫 번째 공판에서 승소를 확정지었다. 반면 베레스의 변호를 맡았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당시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법조인으로 여겨졌으나 이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왕좌를 키케로에게 넘기게 됐고, 베레스는 전 재산이 몰수당하는 일만은 피하고자 아직 정식으로 판결이 내려지기 전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한편 베레스 재판에서 승리한 키케로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로마의 명사로 부상, 다음 해 그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저렴한 가격에 곡물을 대량 판매한 시칠리아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성공적인 조영관 임기를 보내고 법정에서는 대개 명망 높은 가문 출신 인사들의 변호인으로 활약해 신참자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끝에 기원전 66년 수석 법무관을 역임하는 등 순조롭게 로마 정계에서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명예로운 경력]]으로 여겨진 출세코스를 밟아간다. 같은 해 민회에서 당시 전쟁영웅으로 로마인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가 지난해 지중해의 해적 무리를 소탕한 일을 칭송하는 한편 그에게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의 지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해 정치적 기반을 확장해 간다. 임기를 마치고 전직 법무관이 된 기원전 65년, 키케로는 공화정 로마 정무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 선거를 준비하며 훗날 악연으로 점철될 루키우스 세르길리우스 카틸리나와의 정치적 제휴를 염두에 둔다. 이는 높은 확률로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법으로 신분이 보장된 혈통 귀족.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선 몰락한 가문이 적지 않았고 신분에 의해 법으로 보장된 신분상의 특권도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로마보다도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여겨진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 출신 인사는 가문의 명성만으로도 많은 로마인, 특히 선거철에만 로마를 방문해 상대적으로 로마 내부 사정에 어두워 출마자를 배출해낸 가문의 명성에 끌리기 쉬운 외지인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으며, 생득권이라 할 수 있는 상류층에서의 인맥과 존재감도 무시 못할 자산이었다.] 태생인 카틸리나의 존재감이 신참자인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상쇄해주리라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일 텐데, 그런 연유에서인지 이 시기에 쓰인 그의 편지에서 카틸리나는 훗날 서술해낼 불한당이 아닌 긍정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카틸리나가 파트리키적 오만함을 내비치며 법정에서 변호인 역할을 해주겠다는 신참자 키케로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크게 어긋난 것으로 보이며, 키케로는 선거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다.[* 훗날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되자 카틸리나는 다시 키케로의 태생을 조롱하고, 키케로는 카틸리나에 대한 흑색선전으로 응수한다.] 이윽고 다가온 기원전 64년, 키케로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카틸리나,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와 각축을 벌인다. 이때 키케로는 부채 말소 등 급진적이고도 무모한 혹은 기회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해 당시 로마를 휩쓴 불경기로 고통받던 소상점주, 소장인, 인술라 거주자 등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카틸리나와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유산자의 보호자를 자처해 기사계급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대 로마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옵티마테스]][* 간단히 말해 로마 정계를 좌지우지하던 유력 가문 출신 인사들.]가 당선이 유력시되던,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 출신이나 전부터 좋지 않은 평이 떠도는,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카틸리나보단 신참자이긴 해도 유산자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키케로가 낫다는 판단에 그를 지원하면서[* 또한 이 같은 판단엔 키케로가 법무관 시절 내린 하나의 유죄판결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관련 내용은 비판 또는 한계 항목에 하술.] 키케로는 신참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수석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린다. 참고로 차석은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그다음이 카틸리나였는데, 이는 로마의 선거 제도가 신분차등적이었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의 경우 시대별로 비중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가장 부유한 기사 계급부터 차례로 투표를 해 안건이 대한 찬반이 과반수를 넘으면 선거를 종료했는데, 18표를 보유한 기사 계급과 80표를 보유한 보병 1계급의 의사가 합치될 경우 그것만으로도 총 193표가 부여된 켄투리아회에서 반수를 넘어서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카틸리나에 비해 상위 계급을 주 지지층으로 두었으며 당대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옵티마테스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키케로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카틸리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